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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19: 단순화의 네 개 원칙으로 구글 리더 정리하기
나를 향해 쏟아지는 자료/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픈 욕망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체계적'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중에 다시 꺼내어 쓸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자료가 아니라 물건도 마찬가지. 가령 식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싱크대의 첫번째 서랍이나 여닫이문의 보관함 등에 꽂혀있다. 요리할 때 언제든지 빠르게 꺼내 써야 하니까. 그런데 자료(종이, 디지털 등) 같은 경우는 계속 많아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계속 맘에 걸리던 구글 리더의 RSS 피드들을 정리했다.
내용이 좋은 블로그, 사이트를 찾게 되면 RSS 버튼부터 찾아 일단 구글 리더에 추가해 온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꽤 많은 피드가 쌓여있다. 안 읽은 글 수가 '1000+'으로 표시되어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피드가 상당수였다. 사실 저렇게 안 읽은 게 많으면 더 읽기 싫어지고, 구글 리더를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번 정리에 적용한 방법은, 종종 언급하는 레오 바바우타가 제안한 '단순화의 네 개 원칙'이다. 단순화(함)에 대해 많은 이론이 있지만 여기서 복잡한 이론은 이율배반이다. 이 네 개 원칙도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단순함은 특별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 모으기(collect): 정리하려는 모든 것을 한 장소에 모아라.
- 고르기(choose): 정말 중요한 것을 골라라.
- 버리기(eliminate): 나머지는 없애라.
- 정리(organize): 고른 것들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라.
이것을 구글 리더 피드 정리에 적용해 보았다.
- 모으기: 아무런 기준 없이 정했던 분류 폴더들을 삭제하여 피드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놓았다.
- 고르기: 밖에 꺼낸 피드들을 며칠 동안 지켜보며 필요/불필요한 피드들을 판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 버리기: 더 이상 볼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피드들을 과감하게 구독 취소(unsubscribe)했다.
- 정리: 폴더 이름을 세분화하여 더 편리하고 명확하게 분류했다. 구글 리더 폴더는 1단계(depth)만 지원하므로, 뉴스: 일반, 뉴스: 인터넷과 같은 식이다. 2단계 이상을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이 방식을 썼을텐데, 너무 깊은 단계에 있으면 안 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블로그는 개인이 쓰는 것이 많기 때문에 많은 것이 '사람: 어떤 것'으로 분류될 줄 알았으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떤 블로그는 '뉴스: 인터넷'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람: 마케팅'으로 되기도 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개인의 아이덴티티와 브랜드를 강조한 블로그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애매하지만)이 느껴지지 않으면 하나의 정보 블로그로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의 개인 블로그도 그렇게 분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네 개 원칙들에도 단점이 있는데, 고르기와 정리를 할 때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고르기의 기준이 없으면 오늘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두 주 뒤에는 필요한 것으로 느껴져, 버린 후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또, 효과적인 정리의 기준이 없으면 금방 다시 혼란의 상태가 닥쳐와서 이 과정을 너무 자주 반복해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기준들을 구체적으로 정하다보면 이 단순화의 원칙 역시 복잡한 것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딜레마가 있다.
결국 이 기준은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제시해 줄 수 없다. 다만 그 기준을 만들어 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은 있는데, 내 경우는 미니멀리즘, 라이프핵 관련 블로그 그리고 《잡동사니로부터의 자유》라는 책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정보, 물건, 상품이 과연 내 삶에 꼭 필요한 것인가라고 항상 묻는 습관이 가장 중요하다. '지름신'은 광고의 화신일 뿐이다.
2-55-18: 아이와 연결하기
'연결'이 전세계적 화두다. 사회마다 다른 함의를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많은 것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한동안 모든 것의 해결책처럼 제시되던 '소통'은 이제 '연결'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많은 불통에 절망하고는 애초에 연결조차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연결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소셜 미디어가 각광받고 있다. 더 나은 대안이 당장 보이지 않으므로 불가피한 것 같다. 이집트의 시민혁명 사례를 봐도 소셜 미디어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미디어가 사람(의 뇌)을 바꾼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인터넷이 우리(의 뇌)를 바꾸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사실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직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운 흐름 위에 올라탈 것인가, 아니면 이 흐름을 거스르며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것인가하는 선택에 직면한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의 가족 — 아내, 두 아이, 어머니. 그 중에서도 새로운 깨달음들을 계속 재촉하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대학 졸업 이후 경험한 사회는 수평적인 관계가, '민주적' 또는 '효율적'으로 요약되는 가치를 가져올 것이라고 쉼없이 말한다. 현실 속에서의 까마득한 괴리와는 상관없이. 비약적으로 관계를 확장하는 결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아내와의 수평적 관계는 현대의 부부에게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이후에는 새로운 관계를 경험한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상호적이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우선한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자식 입장일 때는 파악하지 못했던, 죽음조차도 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 가끔 독이 되기도 하는 강한 연결을 느낀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육체를 주어서 키우며 교육을 통해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주어야하는,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관계다.
그렇다면 나와 아이의 이 수직적인 관계는 어떻게 맺어져야 할까? 이 관계도 다른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매개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라니, 이것처럼 큰 외연과 내포를 가진 단어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이른바 '타이거 마더'로부터 자유방임형까지 양극단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이 '사랑'으로 자신과 자식 모두를 옥죄는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마케팅'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사랑 한 마디로 무장해제시키고 정체 밝히기를 그만두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사랑의 모범과 방법을 찾을 것인가?
해답은 역시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의 말씀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들께서 알려주신 인(仁), 자비,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익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시작된다. 동시에 이 시도가 올바른 것이기를, 실천할 수 있기를, 내가 만든 사랑이라는 허울로 아이들을 굴복시키려하지 않기를, 이 사랑이 다른 아이들에게 가서는 경쟁과 증오로 탈바꿈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싶다. 단순화시켜보자.
- 성현들의 말씀을 공부한다.
- 그 분들이 말한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 이 사랑을 모범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는다.
- 실천한다.
- 계속 공부하고 반성한다.
- 계속 보완하고 실천한다.
배움 없이 올바른 사랑을 실천하는 부모들도 있다. 존경스럽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은 공부를 해서 실천해야 한다. 가르치는 것은 같이 커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나보다. 그리고 노력 없이 맺어지는 관계는 어떤 가치가 있을지 회의하게 한다.
2-55-17: 첫째 아이를 위한 잠자리 동화
조금이라도 늦게 자려고하는 첫째를 재우려면 유인책이 필요하다. 그전에는 아이 엄마가 잠자리에서 옛날 이야기를 종종 해주었는데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는 여의찮아서, 내가 해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야기를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눕자마자 바로 지어대는 즉흥 창작이기 때문에 상당한 순발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아이는 잠들지만 나는 잠이 확 깨는 상황이랄까.
아무튼 지난주부터 5회 정도까지 이어온 이야기에 다행히 아이가 홀딱 빠져있는데,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 첫째와 동갑인 여자아이와 가족이 있다(이름을 지어보라고 했더니 '미루'로 하잖다).
- 밤마다 지붕에서 '또깍, 또깍'하는 소리가 계속 나서 가족들이 며칠째 잠을 설치고 있다.
- 용감한 미루가 밤에 몰래 마당에 숨어 지붕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 소리의 정체는 작은 우유팩 크기만한 도깨비가 도깨비 방망이로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을 밝혀낸다(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해주신 도깨비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있다 '옛날 이야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 이야기에는 항상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은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고, 아버지와 나는 상상 속에서 먹고 싶은 음식으로 상을 차리곤 했었다. 그렇다고 그 당시 우리가 밥을 굶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 미루와 아빠는 인터넷에서, 도깨비를 쫓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집에 와달라고 부탁한다.
- 그 사실을 몰래 엿들은 도깨비가 자기 친구들을 소환하여 도깨비는 모두 쉰 다섯 마리가 된다.
- 도깨비를 쫓아주는 사람은 너무 많은 도깨비를 보고는 겁을 먹고 도망간다.
- 미루와 가족은 걱정에 빠진다.
- 이걸 지켜보고 있던 미루네 고양이가 주인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 미루네 고양이는 동네 고양이를 모아 회의를 하고 자원자 쉰 네 마리를 뽑아 자신까지 쉰 다섯 마리 고양이 팀을 만든다.
- 미루네 고양이는 이 사실을 미루에게 알려주고 오늘밤 도깨비를 쫓아내자고 말한다(동화에서 고양이가 사람말을 하는 것쯤이야).
- 미루와 고양이는 도깨비를 잡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는데(이 부분이 좀 위험하게 느껴지긴 한다), 도깨비들은 없고 문 하나를 발견한다(고양이 쉰 다섯 마리와 도깨비 쉰 다섯 마리의 전투신은 묘사하기가 힘들고 너무 폭력적일 것 같아 피했다).
- 미루와 고양이는 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청나게 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러나 다치지 않는다(첫째는 아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지 않았다).
- 통로 저 끝으로 도깨비 두 마리가 지키고 있는 문이 보인다. 둘을 간단히 처리하고 문을 열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편에 계속!
어제는 어떻게 대충 넘어갔는데 오늘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야한다. 아… 그 문 뒤의 도깨비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내지.
아이디어 수집합니다.
2-55-16: 얼마나 빨리 '좋아요'?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을 누르며 생각한다. 난 인터넷 밖에서, '이게 좋아요'라고 얼마나 자주 표현하고 있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이 아니지만 잠시만 돌이켜봐도 좋아하는 것들이 참 많다.
지금 마시고 있는 보리차가 정말 시원하고 맛있어서 좋아요,
지금 쓰는 연필의 부드러움이 손끝에 퍼지는 것 같아 좋아요,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듣고 있는 정태춘의 '사랑의 보슬비'가 좋아요,
세련된 표지와 종이로 잘 제본된 책을 한 손으로 잡는 단단한 느낌이 좋아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자리에 앉으실 때까지 출발하지 않고 기다리는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가 좋아요,
맛이 있든 없든 아내가 해주는 주말 점심이 좋아요,
아이 한 놈은 등에, 한 놈은 가슴에 매달릴 때 다리는 흔들리지만 좋아요.
이 느낌들을 표현하거나 기록하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뭐 하나 좋다고 말하려면 그 이유들을 멋지게 풀어놓아 설득하고 공감 받아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있었다. 너는 그게 왜 좋아, 라는 누군가의 반격을 예상했기 때문이거나 자신감의 부족이었거나 그런 것들을 사소하고 순간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려는 미숙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좋은 것을 좋다고하는 것은 해롭지 않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랑하기 위한 것, 다른 이익을 바라고 나는 이것이 좋아요라고 거짓 증언하는 빈번하고 불쾌한 사례들 — 공짜 제품 받고 밝히지도 않은 채 정말 좋다는 리뷰 쓰는 이들, 떼로 몰려가 공짜 음식 먹고 맛집이라고 소개하는 이들 — 이 아닌 한 말이다. 한편,
- 난 이게 정말 좋아.
- 너도 이걸 경험해 봤으며 좋겠어.
- 자, 인터넷에 올리테니까 봐봐.
처럼 이어지는 마음이 있다. 난 여기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1번의 상태에서 좀 더 오래 고요히 기쁨을 느끼며 좋아하는 것, 아니면 빠른 시간 안에 1, 2, 3번의 과정을 거치는 것.
말, 생각, 음악, 사진, 영화, 책 등이 디지털로 바뀌어 네트워크로 모여들고 있다. 만드는 것도 유통하는 것도 소비하는 것도 편하고 빠르다. 좋아하는 것도 더 편하게 더 빨리 더 많이 좋아해야 한다. '지금 널 누르지 않으면 페이지가 넘어가 다신 좋아하지 못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나'. 최근에는 페이스북의 "좋아요"가 이 흐름에 앞장 서고 있다.
'좋아함'이란 무엇일까? 좋아함은 느낌일 뿐일까? 매순간 변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오래, 강하게 좋아해야 좋아하는 것일까? 찰나의 순간 동안 마음이 움직인 것도 좋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내게 즐거움[快]을 주었다면 그것이 곧 좋아한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것은 텅 비어있는 것인가?
계획 하나가 생겼다.
- 내가 하루 동안 좋아한 것들을 매일 기록한다.
- 일주일 후에 그 목록들을 다시 본다.
- 여전히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분류한다.
- 인터넷에 올린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좋아함'에 대한 내 생각이 정리가 될지도 모르겠고,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정보가 되는지도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2-55-15: 해외 사례를 참고하는 문제
'아이패드용 잡지가 살아날 방법'(iPad publishing: time to switch to v2.0)'이라는 유용한 글을 읽다가 든 생각이다(항상 좋은 글을 번역해 주시는 애플포럼의 casaubon님께 감사). 만약 국내의 컨텐츠 또는 e북 업체가 이 글에 등장한 퓨 리서치 센터의 보고서를 참고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과 미국은 인구통계학적 구성, 사회의 물적 토대와 문화, 미디어/컨텐츠 산업의 배경과 규모 등등 모든 것이 다르고, 일치하는 것이라고는 사람이라는 것과 아이패드를 쓴다는 것 정도이다. 다시 말해, 네트워크의 구성과 질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아이폰, 애플 앱스토어, 그리고 '앵그리버드'와 같은 앱처럼 세계적 성공을 거둔 사례, 매우 다른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목표(상업적 성공 등)를 달성하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음의 절차를 거치면 어떻게 될까?
- 성공적인 네트워크 사례를 가져온다.
- 해당 사례를 분석해서 국내에서 동일하게 활동하는 구성요소(행위자)와 다르게 활동하는 구성요소(행위자)를 찾아낸다.
- 다르게 활동하는 것을 국내의 네트워크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여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든다.
- 이 해석과 적용을 누가,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가 나온다.
- 동시에 이 작업을 한 사람/업체와 방법 역시 네트워크의 새로운 구성요소(행위자)로 편입된다.
- 1번의 네트워크와는 전혀 다른 네트워크가 된다.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자신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으로 만든다(스티브 잡스처럼?). 복불복, 수업료 등등이 떠오른다.
결론은, 해외 사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결과를 운에 맡기는 일이고, 추가로 필요한 분석 없이 인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는 것이다.
2-55-14: 숫자 붙이기, 개념화, 창의성
어떤 것에 숫자를 붙이면 사람들이 더 쉽게 알고 느낀다. 가령 '제주 올레 7코스', '서울 북촌 7경', 트위터의 팔로잉/팔로워 수가 표시되는 것, 페이스북 '좋아요!' 버튼에 사람들이 누른 횟수가 표시되는 것 등 말이다.
무질서, 인식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숫자로 규정/한정함으로써 그것은 '질서', '인식가능한 것'으로 바뀐다. 이것이 서양 근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수학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학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시도들.
이전에는 웹사이트나 블로그에 글을 올려도 정확히 누가 몇 명이나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카운터, 통계 프로그램 등은 허수가 많았고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트위터는 내 글을 보겠다고 (지켜질지 알 수 없는) 선언을 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가 명시된다. (최소한 온라인 상에서)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페이스북의 핵심인 '좋아요!'는, 내 글을 읽긴 하지만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던 모호함을 없앴다. 역시 누가 몇 명이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그 안에 좋아함의 정도 같은 것 —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제주에는 올레 위가 아니어도 아름다운 곳이 있고, 서울 북촌 7경보다는 처마를 맞대고 있는 좁은 골목이 더 정겨울 수 있다. 모래를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새는 모래들이 있다. 내 손 안의 모래로 모래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모래의 전부는 아니다.
현실을 파악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려면 개념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정신은 기존의 개념에 파묻혀 달콤한 꿈만 꿀 뿐이다. 총체적인 경험과 학습 속에서 나의 개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창의성이다.
2-55-13: 동사로서의 '창조'
개인 블로그의 좋은 점은 누군가를 향해 주절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절주절.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읽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기를 쓸 때보다는 조금 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확실치는 않은 독자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상하고 글을 쓰고, 그 알 수 없는 독자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어떤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검열이기도하고 격려이기도하고 억압이기도하고 동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블로그의 '나'는 그 힘과 뒤섞인 또 다른 '나'가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모두 머리에 이고 글을 쓰는 것은 심한 자기학대다. 글쓰기, 창의성에 대한 많은 책들이 우선 짚고 넘어가는 것도 이 점이다. 네 안의 비판자를 잠재우라. 일단 쓰고, 만들라. <젠해빗Zenhabits>의 바바우타는 매번 비슷한 주제들을 다른 식으로 풀어내는 '습관'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는 이유는 역시 본인이 쓴 글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하라Create.' (('만들어라'가 더 적절하겠으나.)라는 글은 그런 면에서 역시 평범했지만, 하나 건진 것 — 뭔가 만든다고 할 때 떠올려야 하는 것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창조적, 크리에이티브creative가 아니라 창조하다, 크리에이트create여야한다. 명사나 형용사는 설명하고 묘사할 뿐이다. 변화는 동사가 가져온다. 안팎의 적들을 묘사하는데 골몰하지 말고, 쓰고 만들고 올리기 — 이것이 내 적들을 공격하고 친구를 위로하는 방법이다.
'창의적이기 위한 29개 방법29 Ways to Stay Creative' 같은 글도 도움이 되긴 한다. 그러나 이런 류의 글 또한 '만들기' 전까지 어떻게 '준비운동'을 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를 알려줄 뿐이다. 그리고 이런 글들이 시간 끌기, 미루기, 핵심에 다가가지 않기에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몸만 풀다 끝날 수 있다. 이제 난 두려움 없이 만들고 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