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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5: 좌담회, 일기
지난 수요일(8.18)에는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출간 기념으로 열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 좌담회를 다녀왔다. 좌담자는 강유원 선생님, 김영건 선생님, 이유선 선생님이셨다. 세 분 모두 존경하는 철학자들이시다. 기억에 남는 것은, 세 분 모두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오셨음에도, 한국에서 철학 뿐만 아니라 '학문'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 힘들 것이라고 담담히 말씀하시던 것,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모두를 넘나드는 '양손잡이'가 되어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 세 분이 각자 다른 분야의 철학을 전공하셨지만 핵심과 방향에 있어서는 크게 동감을 이루고 계신 것 같았다는 것이다(하비 맨스필드에 대한 호오는 제외하고).
이유선 선생님은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는 부분은, 남이섬으로 가족 소풍을 간 일화가 등장하는 '마음의 존재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정영문 《달에 홀린 광대》' 편이다. 좌담회 중 강유원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런 답답하리만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철학과 만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흥미로운 충격이었다. 왜? 나의 지리한 일상도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에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이, "하나 하나의 글들이 세 토막짜리 형식"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철학적인 개념이나 문제에 대해서 철학자 혹은 철학책과 함께 간단히 언급하고, 그런 개념이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는 문학작품에서 몇 구절을 가져와 연결지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좌담회에서도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밝힌 참석자들이 이유선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했다.
이유선 선생님은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을 계승하여 네오프래그머티즘으로 재창조한 리처드 로티에 대한 책인 《리처드 로티》라는 책을 쓰셨다. 이 책을 참고하면 왜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라는 제목이 만들어졌고, 세 토막짜리 형식을 갖게 되었는지 눈치 챌 수 있다. 일부 인용해 보겠다.
문학적인 문화는 보편적인 진리라는 개념에 대한 강박증에서 벗어난 문화이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창조자이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리에 대한 창조자이다. 누구나 자신의 메타포를 가지고 저마다의 삶을 뽐낼 수 있도록 배려되는 문화이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진리를 타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천에 대한 책임을 인간을 넘어선 어떤 것에 돌리지 않는다.
문학적인 문화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로티는 문학적인 문화의 영웅을 시인과 혁명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이란 자아창조의 작업에 뛰어난 인물이며, 혁명가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실천가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사적인 영역에서 후자는 공적인 영역에서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로티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별개로 보고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론적 탐구의 작업이 타자에게 강요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아이러니스트적인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신의 글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거나 영향을 미치기 바라는 이들에게는 탐탁치 않은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블로그에 일기를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일기처럼 앞의 내용들을 포괄하며, 바로 내 옆에 있고, 읽는 이들에게 친숙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내 일기로 세상을 바꾸겠어, 라며 비장하게 각오하는 사람은 없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일기를 왜 공개적으로 쓰려고 하는 것일까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존경하는 김구용 선생의 산문집 《인연》 중 '일기는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편을 소개하고 싶다. 역시 일부 인용한다.
요즘 세말에 나오는 일기책은 종류도 다양하고 가지가지 특색이 있더군요. 언젠가 보니 열쇠가 붙어 있어 잠그도록 만든 일기책도 있었습니다. 남이 읽을 수 없도록 지켜준다는 뜻이겠지요.
나는 그런 일기책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이 읽어서는 안 될 일기라면 쓸 필요조차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안네의 일기》는 비밀히 쓴 일기였습니다만 마침내 그 일기는 많은 독자를 가졌습니다. 《도둑 일기》는 프랑스 작가 장 즈네가 남들이 읽어주기를 바라고서 쓴 작품입니다.
이런 뜻에서 남이 읽어서는 안 될 일기를 쓴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요, 실례되는 짓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많습니다. 일기도 문학의 일종이라면 사실만을 그대로 기록해서는 가치가 없습니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만의 큰 사건은 아닙니다. 말이란 묘한 것이어서 같은 뜻일지라도 표현에 따라 얼마든지 품격 있게 더 절실하게 전달된다는 경우를, 우리는 평소의 독서에서 많이 느껴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남이 보아서는 안 될 일기를 쓰느니보다는 사실보다도 더 감명을 줄 수 있는 표현을 닦아야 합니다."
아무튼, 나와 남의 생각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알 수 없는 삶이지만 조각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일기를 쓰자는 것이 결론이다.
2-55-4: 기업의 소셜 미디어 참여, 공공성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 각종 소셜 미디어의 활용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른바 '소셜 미디어 전도사'들이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자료들을 빌려다 할텐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서 자사 서비스를 홍보하고 간접적으로라도 매출로 연결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니, 몇 가지 정리해 보자.
첫째로, 각종 소셜 미디어의 정의, 구조, 현황, 시사점 등 개념적 파악을 시도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하면, 추가해야 하는 내용들이 있다. 인터넷이란 네트워크의 특징, 뜨거운 이슈인 스마트 폰과 같은 모바일 디바이스, 욕심을 낸다면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의 차이까지. 이렇게 공부하는 것, 물론 필요하지만 교육 받고 당장 써먹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봤을 때 회의적이다.
둘째로, 기존 인터넷 마케팅 기법들의 연장선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객과 대화해라'라든가 '입소문이 나게 만들어라' 같은 것들. 마케팅에는 문외한이어서 의견을 내놓기가 조심스럽지만, 소셜 미디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기존 마케팅 기법들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다양한 응용이 가능할테지만 그런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고, 앞으로 나올 성공 사례들을 주목해 보도록 하자.
셋째는 둘째와 연결되는데, 여러 성공과 실패 사례들을 수집하여 학습하는 것이다. 마케팅 사례를 포함하여 모범이 될만한 기업 소셜 미디어 운영 사례, 넓은 범위로 확산된 사례, 소비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낸 사례 등과 의도와는 달리 실패한 사례들을 함께 말이다. 이 사례들을 현재 우리 회사의 사업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변형해서 실행해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셜 미디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깔려있어야 할 것이니 첫째의 내용도 일부분 필요하겠다.
넷째로는 소셜 미디어 서비스들의 실제 사용법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트위터의 팔로우, 리플라이, 리트위트(RT), 페이스북의 친구 신청, 페이지 만들기, '좋아요'의 활용 등이 예가 되겠다. 이 경우 바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은 있겠으나, 소셜 미디어 전체가 엮여 돌아가는 큰그림을 보려면 일정한 시간 이상을 직접 뛰어들어 사용해 보아야 하고, 그 큰그림 속에서 우리 회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방향성을 놓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내용으로 교육하든지 필수적인 것이 되겠다.
다섯째로는, 위의 모든 안을 종합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방대한 내용 속에서 처음 원했던 방향(자사 서비스의 홍보와 매출로의 연결)을 잃고 방황하는, 교육을 위한 교육이 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에 일관성을 흐르게 하여 방향을 잃지 않고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에 대한 안으로, '공공성(公共性)' 개념에 대해 궁리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안은 기업 소셜 미디어의 교육이나 학습부터 실제 운영에까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도미노피자 홈페이지)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국립국어원)이다. 그러나 회사가 추구하는 이익[社益]은 사적인 이익[私益]이다. 사익을 목적으로, 공적인 성격이 강한 소셜 미디어/네트워크로 들어오면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트위터의 경우, 헌혈증 기부, 실종자 찾기, 비리 고발 등에 대한 반응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공공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하겠다. 반면 최근 도미노피자가 트위터에서 벌인 이벤트가 트위터 문화를 망치고 있다는 사용자들의 항의를 받자, 도미노피자 측에서 황급히 이벤트 일정을 조정하고 사과문을 올린 것은, 사익과 공익이 충돌한 좋은 사례이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이 사익과 공익의 충돌을 어떻게 조정하거나 조화시킬 수 있을까?'이고, 그에 대한 대답은, 앞에서 언급한 '공공성'을 매개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공공성을 '사회적 자본'으로 한정하고자 하는데, 사회적 자본이란 "개인들 사이의 연계,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다."(로버트 퍼트넘,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 , 2009, p.17.)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모두의 기반이 되는 이 사회적 자본은 이성적 지식과 판단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공동체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면서 사회적 이슈에 반응하는 감성을 기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정치적 의식과 행위로까지 전개하는 전반적인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강유원, <사회적 감성, 정치적 의식, 정치적 행위>, 2009, p.7.)
기업, 단체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사익 추구가 어떻게 이 사회적 자본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로 서비스별로 구체적인 실행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공공성의 필터'를 통과한 기업 소셜 미디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이야말로 기업의 사명과 비전을 소비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업종별로 특징있고 흥미로운 방안들을 떠올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 기존 인터넷 마케팅의 성공 사례들에서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성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고 지혜롭게 추구하는 것은 질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사회 공헌 등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연결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소셜 미디어와 연결되어 상승효과를 가져오는 사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내일부터 사명과 비전을 확인하고 실행방안을 만들어 봐야 겠다("트위터 개설 기념으로 이 글을 RT해주시면 10분께 선물 드려요."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2-55-3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며칠 전 신문에, 읽었던 책에 대한 소개가 나왔다. 책 제목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여름언덕). 드물게, 몇 명에게 빌려줬던 책인데, 모두들 제목만 보고 내용을 지레 짐작했는지 읽고 나서는 그런 책일지 몰랐단다(감사인지 원망인지). 무리도 아닌 것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정직하게 거짓말하는 법'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렵다. 일상 중 책에 대한 대화를 위해서는 서로 간에 '그 책 읽었어?'를 확인한다. 읽지도 않고 떠드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심하게는 사기꾼으로 몰릴 수 있다. 책읽기에 관한 최소한 몇 가지의 금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은 그 당연하게 여겨지는 금기들을 뒤집으며 '책읽기'를 다시 해석한다.
이 책에 대한 강유원 선생님의 서평을 인용해 보자(서평 전문은 allestelle.net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대우주와의 연쇄가 끊어진 집단은 집단 속의 개인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은, 온갖 측면에서 길어올려진 이야기들이 개인의 귀근처로 다가와서 개인의 머리 속으로, 가슴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은 이들은 소곤거리며 그것을 주고받으며, 가끔은 단어 하나에 문장 형식에 목소리를 높이고 그것을 진지한 취향으로 정당화한다. 기원origin을 알 수 없으니 독창성originality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기댈 것은 '자기-진실성의 이상' 뿐이다.
…
진실, 그것도 내면의 진실은 객관적 공유의 공간에 나설 수 없고, 나선 순간 공허해진다. 그 누가 믿겠는가, 그것이 진실임을, 내면 밖으로 나온 것은 내면 밖에 있기 때문에, 더이상 내면에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진실일 수 없다.
…
두 사람이 같은 책을 읽은뒤,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책이라는 매체가 끼어들면 대화가 조금이라도 가능해질까.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
책을 읽는 주관은 '근대의 주장'과는 달리 철저하게 독립적인 자기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일부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주관들과 경계를 겹치고 있는, 집단의 일부이다. 실상을 인지하고 못하고 여전히 저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착각하는 근대인의 고집이요, 저 주장을 저만치 밀고나간 것은 근대의 심층적 자기 고립과 착각의 심화에 불과하다.
…
우주와의 연쇄를 잃어버린 이는 외롭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자기-진실성에 침잠하기 보다는 자기정체성의 공공성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자 하나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하니 참으로 고통스럽다. 여기서 그만 두어도 그만이고, 앞으로 나아가도 된다. 그렇다면 책을 딛으며 앞으로 나아갈 이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
이제 책 하나 하나를 읽어서, 그러한 읽기를 쌓아올려 모든 책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버려야 한다.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소통과 연결선들", "관념들 사이의 관계가 관념들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론"에 의존하는 것이요, 책과 저자 전체가 공유해야 할 "집단 도서관"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책읽기는 고립된 섬에서 까닭없이 보석을 모으는 일이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책만이 아니라 비물질적 대상 일반으로까지 이러한 생각을 확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집단 도서관은 책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책에 대해 주고받는 이야기들, 책이 야기하는 모든 반응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집단 도서관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고 — 이것이 가능하다면 — 그 세계 속의 타인과 상호작용하는데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가상적이지만 동시에 실체적인 공동의 객관적 정신이라 하겠다.
…
내면 도서관이 없다면 새로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 하나 받아들일 수 없다. 백지상태에서 무언가를 써넣을 수 없다. 내면 도서관이 있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과 합치되지 않는 것들은 거부된다. 그러나 내면 도서관은 외부의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인다. 내면 도서관에는 "내면의 책"이 있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필터처럼 기능하면서, 어떤 요소들은 간직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자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텍스트들의 수용을 결정짓는다." 그리하여 책은 이렇게 저렇게 찢기고 조각나서 "결국에는 내면의 책에 의해 구성된 성찰의 틀 속으로 녹아들아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우리는 대상을 온전히 가져올 수 없다. 우리가 만들어낸 텍스트들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우리가 내면에서 만들어낸 책들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일 뿐이다."
…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흔히 있는 경우이며, 부끄러움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것, 즉 책이 아니라 어떤 복합적인 담론상황 — 책은 이 담론상황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결과이다 — 에 관심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자기 자신이 창조자가 되는 것, 바로 이 계획이 이 책에서 우리가 일련의 예들을 바탕으로 행한 모든 사실 확인의 귀착점이며, 이는 내적 진전을 통해 잘못을 저지른다는 느낌으로부터 해방된 이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계획이다."
문화, 공유하는 지식
그리고, 움베르트 에코의 인터뷰(출처: '움베르트 에코, 인터넷 지식의 위험성' by 파리13구)가 떠올랐다.
우리 시대의 기억이란 보르헤스가 상상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물인 퓌네스를 떠올리게 한다.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바보같은 짓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여과없는 기억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인테넷에서, 우리는 더이상 허위 와 진실을 구분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이 기억의 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문화란 공유되고, 토론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집단을 문화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토론하고 협상해서, 보존해야만 하는 것을 위해서, 특정한 작품들, 사이비 생각들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다는 것에 합의할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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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식의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만인이 공유하는 지식이 없었다면, 지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과학혁명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우리는 완벽한 소통 불가능성, 보편적 지식의 불가능성이라는 직면해 있다. 분명히, 사람들에게 보편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학교를 통해 이루어 지고 있지만, 점점 보편적 지식들이 특수한 흠집내기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자신만을 위한 백과사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문화란 바로 바보들이 틀리지 않게 바로잡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문화를 만들고 문화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보편적 지식(공동 지식)을 위한 "집단 도서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집단 도서관"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세계 속의 타인과 상호작용하는데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가상적이지만 동시에 실체적인 공동의 객관적 정신"이고, 이것은 상호작용을 위한 '매개'의 관점으로 다시 볼 수 있다.
트위터에서 상호작용은?
우리는 트위터를 하며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상호작용'을 앞의 내용에 나온 맥락으로 한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우리는 트위터에서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을 공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트위터가 이 시대의,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의 단초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트위터 사용자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자기 마음대로 팔로잉을 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맥락에 가까운 타임라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팔로잉하지 않은, 심지어 팔로잉했다가 보기 싫어서 언팔로잉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리트위팅을 통해 자신의 타임라인에 나타났을 때의 그 불쾌함이란!(이 내용은 트위터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가 닿지 같겠다.)
트위터나 관련 서비스들도 이 맥락을 묶어 서비스하려고 이런저런 시도(해쉬 태그, 그룹 서비스, 트렌드 검색 등)를 하고 있으나, 이것을 통한 회원 간의 상호작용은 하나의 사건, 주제, 소재를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정신 없이 촉발되고 소멸되고를 반복한다. 하나의 주제가 지속되려면 계속 연료를 제공해야 한다. 많은 이들을 팔로잉하고 있는 사람의 타임라인에는 이런 갖가지 내용의 '불꽃'들이 정신없이 터질텐데, 그것들에 조금씩이라도 관심을 보이는지 아니면 무시하는지 내게는 아직 수수께끼이다.
트위터에 대해 궁금한 것은 이거다. 사람들은 과연 이 정도 수준의 상호작용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인가? 완벽한 소통을 위한 상호작용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친밀한 대상과만 시도하는가? 또는 우리 시대는 이 정도 수준의 상호작용에 만족하고, 공동의 객관적 정신의 구축을 통한 것이 아닌, 새로운 매체를 개발하고 그에 적응하며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인가? 비관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역시 존댓말로는 글을 못 쓰겠어.)
2-55-2
페이스북, '오픈' 단상
('KISDI'라고 쓰고 '키스디'라고 읽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보고서 몇 개를 내놓았는데, 눈길이 간 것은 <SNS에 나타난 취업희망자의 성향조사와 프라이버시 이슈>(유지연)와 <페이스북의 부상(浮上)과 시사점>(공영일)인데 그 중 두 번째 것을 읽었습니다. 모두 10페이지이고 내용은 현황, 성장요인, 향후 전망, 시사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 세계 1위 SNS 사업자이고,
- 2010년 6월 기준으로 5억 명에 가까운 회원을 가지고 있는데
- 1억 명이 증가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고,
- 시장점유율은 이미 구글을 넘어섰고(2010년 3월 U.S. 1년간 방문수 기준),
- 모바일 인터넷 시장 진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점은 글로벌 온라인 사이트 중 방문수 기준으로는 3위이지만, 체류 시간 기준으로는 월등한 1위(인당 6시간)라는 것입니다(2010년 4월 기준, 9개 국가 대상). 이건 양적, 질적 모두 압도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나머지 내용은 다른 곳에서도 본 듯한 것이니 읽어보면 아실테구요).
성장 요인으로 들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페이스북이 도입한 다양한 오픈 전략들(오픈 API, 페이스북 커넥트, 오픈 그래프 등)인데 이 '오픈'이라는 것이 듣기에도 괜찮고 뭔가 좋은 일 하구 있구나 싶은 느낌을 줘요. 이른바 '개방, 참여, 공유를 지향하는 웹 2.0'의 동굴을 통과하며 많은 서비스들이 쓴맛, 단맛 봤을 텐데요, 이제 와서 보면 그게 일종의 '화장' 또는 '위장막'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사실 이 '오픈'이 오픈 소스 운동의 '오픈' 같은 의미는 아니잖아요. 사업자, 사업 파트너, 광고주, 회원의 이해 관계를 적절히 조정해서 관리할 수 있을만큼 '오픈'하는 것이죠. 외부 네트워크와의 연결 고리를 많이 만들어 놓을 수록 네트워크 효과도 생기고 이익이 되니까 하는 것이기는 한데, 이 '오픈'에 사업자의 장삿속이 지나치게 드러나면 서비스 이미지에도 안 좋고 사람도 안 모이고 돈도 못 벌겠죠. 그래서 '웹이 나아갈 옳은 방향'으로 포장된 '웹 2.0'이 그런 장삿속을 적절히 가려주고 이미지 관리도 해주는 역할을 한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말해, '오픈하면 좋은 서비스, 좋은 회사' 뭐 이런 식.
3~4차원 네트워크
제가 생각하는 페이스북의 성장 요인은 다양한 종류의 네트워크를 3차원(입체적)으로 겹쳐서 잘 연결시킨 것에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무슨 말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구요). 그 유명한 《링크Linked》 같은 책을 봐도 노드, 허브, 각종 네트워크 등등을 2차원(평면적)으로 그려놓았잖아요. 그런데 이제 현실의 네트워크를 파악하는데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문외한으로서 감히 해봅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페이스북만 보더라도
- 회원 네트워크가 있고,
- 친구 추천, 친구의 친구 추천 등을 통해 네트워크를 계속 생성, 연결시키고,
- 또 그 회원들은 서비스 밖에, 언제든지 페이스북 회원으로 만들 수 있는 친구들(네트워크)을 가지고 있고,
- 서비스 밖의 네트워크라하면 페이스북이 아닌 다른 인터넷 서비스(예를 들어, 지메일Gmail)의 네트워크일 수도 있고,
- 학교 친구나 동네 친구 네트워크일 수도 있고,
- 어떤 회원들은 외부 어플리케이션 개발자일 수도 있고,
- 상품 마케팅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회원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균질하다고 보기에는 워낙 다양한 네트워크가 겹쳐져 있다는 것이죠. 실험실 안의 네트워크가 아니니까요. 이미 다변화된 공간이라는 요소는 끼어들었고, 시간이라는 요소(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까지 끼어들면 어떤 네트워크가 될지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요즘 너도나도 SNS 마케팅 해야 한다고 하던데, 성공 사례가 흔치 않은 것은 상품 마케팅만을 위한 1차원적 활동으로는 이 네트워크의 변화를 탈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함께 대화하라"는 계명이 말은 쉽죠, 꾸준히 지켜보고 활동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죠.
공간, 욕망, 반영웅
머리가 살짝 아프군요. 잘 정리된 방 사진을 보며 머리를 정리합니다(이미지 출처: Wired).
이렇게 잘 정리된 인테리어 사진들을 보면 부럽다가도 현실을 생각하면 말이죠, 방도 커야 해, 집도 커야 해, 그럼 당연히 돈 많이 벌어야 해. 욕망의 펌프질과 악순환. 물론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꾸미는 것을 표방하는 블로그들도 꽤 있어요. 그러나, '너네들은 이 정도 크기를 작은 공간이라고 부르냐'라는 생각이 들며 울컥. 한국적 서민형 'Apartment Therapy' 같은 블로그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얼굴 없는 천사 또 1억 기부' 같은 기사를 보게 됩니다.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어릴 때 모진 고생을 잘 이겨내시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신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 기부하는 것뿐입니다." 짧은 몇 마디이지만 이 분의 아버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교육, 부모에 대한 자식의 존경, 신념의 실천 등 많은 것이 가슴을 스치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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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보니 트위터 등등의 인터넷 서비스에 올리는 글 이외의 글을 쓰는 것이 굉장히 어색해졌어요. 그래서 뭔가 쓰려면 일단 온몸의 세포가 긴장을 하고, 그 중에 뇌세포가 가장 쫄아붙는 듯. 괜찮아, 괜찮아 최면을 걸지만 아직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여 다스릴만한 내공이 되질 않아서 몸둥아리, 그 중에 손가락부터 다스려야 하겠어요. 만년필로 끄적여 대기도 하고 키보드를 스다듬기도 하고, 그동안 너무 오래 준비만 해왔잖아요. 근데 느낌이 괜찮아.
이사, 마당, 꽃과 나비
제가 얼마전에 이사를 했잖아요. 내가 해 본 이사 중에 가장 힘들었어요. 추운 겨울 바람 맞아가며 이사 가려는 동네들 분위기도 파악하고, 부동산도 약 서른 곳 이상 연락해 보고 그랬네요. 이사온 집이 좋은 건, 다른 건 모르겠고 골목 안에 있어서 조용하다는 것과 꼬딱지만한 마당이 있다는 것. 그래서 마당 한 켠에 키우던 화분들을 늘어놓고 벽에 담쟁이를 새로 심어서 올리고 있어요. 마당 한 쪽은 옆집 벽이 높이 올라가 있어서 덮을겸 해서 심은 건데 성에 찰만큼 빨리 크지는 않네요. 인터넷으로 작은 모종 10개를 사서(실제로는 9개만 왔음) 심었는데 한 놈만 비실비실하고 이제 다들 벽에 붙었어요. 올여름 안에 벽을 다 덮기는 힘들 것 같지만 하루하루 조금씩이라도 자라는 걸 보면 기특하죠. 처음에는 매일 들여다 봤답니다. 이것들이 왜 빨리 안 크지하는 조바심으로. 근데 이게 무슨 팜빌 같은 인터넷 게임도 아니고. 지금은 꼬박꼬박 물 주며 지켜보고 있답니다.
정말 작은 마당이지만 풀과 꽃에 대해, 잊었던 관심도 생겨요. 얼마 전엔 나비를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세밀화로 보는 꽃과 나비》(권혁도 글·그림, 길벗어린이)라는 책을 사줬습니다. "권혁도 작가는 세밀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더군요. "밑그림을 그린 뒤에는 바늘 끝 같은 0호 붓으로 수채화 물감을 사용해 채색하는데 하루 종일 그려봐야 잠자리 날개 한 장이 고작"이라고 합니다. 지금처럼 사진 기술이 발달했는데 왜 굳이 세밀화를 그리는 걸까라고 생각했는데, 사진은 "그림자나 원근 때문에 실제 모습을 재현하기 힘든" 면이 있다고 합니다. ('곤충도감보다 더 꼼꼼한 나비 탐구', 위클리경향 881호 ) 마당에 나비가 찾아와 앉은 적이 있는데, 마술 같이 신비한 시간이랄까요 뭐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나비들이 좋아하는 꽃을 심어볼까해요.
한마디로 '정리'
그리고 이사와 정리는 떨어질 수가 없죠. 정리와의 질긴 인연. 회사를 다니면서 각종 자기계발서를 보죠. 동료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의 제목이라도 봤을 겁니다. 가령 메모를 잘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든가, GTD라든가, 톰 피터스라든가 그런 내용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 마디로 '정리'(整理)가 아닌가 싶어요. 사전의 뜻을 짚어보면, '정(整)'이 가지런히 한다, '리(理)'가 다스린다는 글자이고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에 따르면 1.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 2.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종합함, 3. 문제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을 줄이거나 없애서 말끔하게 바로잡음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 뜻들은 살펴보면 일단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어떤 것이 올바른 것(질서, 체계, 바로잡음)인지를 알고 있어야 정리를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좀 더 나아가 '리(理)'자를 한자사전(오픈마인드)에 나온 뜻에 따라 사리, 도리, 이치로 풀이하면(이렇게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더욱 확실하죠. 그러니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자기중심 없이 정리 '방법'에만 휩쓸리다보면 자기 정리도 안 되는 지경으로 치닫는 것이죠.
그래도 US의 각종 정리 관련 블로그들을 보면 저력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주로 보는 것은 '라이프해커(Lifehacker)', '젠 해빗(Zen Habits)', 최근에 '언클러터러(Unclutterer)', '스텝케이스 라이프핵(Stepcase Lifehack)'도 잘 보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도 수준 차이가 있는 법이어서 기술을 넘어서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본 것('Joan Rivers and Twyla Tharp, Organized Artists')은, 예술하는 사람들은 정리를 잘 안 하다는 고정관념을 깨주는, 구식이지만 자신의 직업과 생활습관에 착 달라붙어 한몸이 된 그런 방식으로 정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뭐가 맞고 올바른 것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인 것이죠.
윤성호 감독
착 달라붙는다니까 생각이 나는데, 눈과 맘에 착 달라붙는 영화를 봤습니다. 사실 2년 전 개봉했을 때부터 보고 싶었던 것인데, <은하해방전선>이라고, 윤성호 감독의 영화입니다. 윤성호 감독이 요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라는 인디 시트콤을 찍어서 보여주고 있죠. 사실은 이걸 먼저 보고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를 구할 방법이 없더라구요. 고백하는데, 다운 받아보고 DVD로 샀습니다. 윤성호 감독이 영화 만드는 방법이 와닿습니다. 솔직한 접근, 솔직한 자기 감정에만 파묻혀 관객에게 전달을 못하는 것도 아니라 아주 잘 하고, 영화 전편에 도도히 흐르는 유머 감각 등이 말이죠. 앞으로의 영화도 기대가 됩니다. 트위터도 쓰고 있어요.
페이스북 '좋아요!'
요즘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늘어서 재밌게 쓰고 있는데요, 웹서핑 하다보면 여기저기
버튼이 많이 보입니다. 이걸 클릭하면 이 버튼이 붙은 콘텐트가 페이스북에 퍼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너도나도 붙이고 있죠. 그래서 저도 붙였습니다. (많이들 눌러 주시구요.) 붙이는 방법은 간단해요. 페이스북에서는 이런 것들을 '소셜 플러그인(Social plugins)'라고 부르는데 '라이크 버튼(Like button)'은 그 중 하나입니다. 이걸 설명해 놓은 페이지 가서 필요한 정보 입력하면 코드를 뿌려주고 그걸 원하는 페이지에 붙여 넣으면 됩니다. 워드프레스 블로그를 쓴다면 'Facebook Like' 같은 플러그인으로 더 쉽게 구현할 수 있구요. 트위터도 재밌지만 앞으로 페이스북도 재밌게 써보렵니다. (친구 신청 많이 해주시구요. 제 프로필 주소는 http://facebook.com/hochan.choi)
앞으로 이렇게 매일 써보려고 하는데 말이죠, 사실 굉장히 해보고 싶었어요. 블로그는 예전부터 썼지만 블로그를 넘어서는, 나 자신의 매체라는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것말고 주간으로 준비하는 것도 하나 있는데, 그건 여러 방식으로, 오프라인 지향이 될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