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태닉 가든에서 나올 무렵엔 한낮의 땡볕아래 어디 시원한 곳에 좀 들어갔음 좋겠다는 마음 뿐. 얼릉 택시를 잡아타고 쇼핑가로 가며 에어컨 바람에 한 숨 돌리고.
한번 가보고 싶었더 자라 매장에 들러 마음에 드는 핫팬츠를 하나 산 후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차이나 타운이라고 내려준 곳의 풍경은..
언제가 친구들과 외국 여행을 갔는데 지하도를 건너다 일행과 헤어지고 어느 백화점 안에서 안내방송해서 겨우 화장실에서 다시 상봉하게 되는 스토리의 꿈에서, 심란한 마음으로 지하도를 막 나왔을 때 도시의 소음과 함께 눈 앞에 나타났던 복잡해 눈이 돌아갈 것 같은 건물들의 거리.. 바로 그 모습이어서 놀랬다.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자 '여기가 서울랜드야?' 싶게 2층 높이의 색색깔로 칠해진 건물들이 주르르.. 온갖 기념품과 선물, 그리고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들을 지나 먹자골목이라고 부를만한 길 한가운데 테이블을 주르르 놓고 음식수레들이 줄지어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을 찾았다.
한 가족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수레 앞에서 고민을 한 끝에, 해물이 들어간 매운 누들과 볶음 누들, 물만두 세트를 시켰다.
(우리가 한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을 하는 중에도 30대 중반의 주인은 한번 눈길 주는 일도 없이 자기 일에 바빴는데.. 그의 팔 여기저기에 있던 분홍색 데인 자국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싱가폴에 온 후로 맛들이 타이거 맥주를 사온 남편이 받은 음식 그릇 세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길래 보니.. 거의 색과 모양은 쓰레기에 가까웠는데.. 의외로 맛은 좋았다.
내가 먹은 볶음 누들과 물만두는 우리 돈 2, 3천원 밖에 하지 않는 음식치고는 괜찮았다 정도였는데, 해물 누들을 먹은 남편은 주성치의 식신에 나오는 완자가 들어간 국수를 봤을 때 상상했던 맛과 거의 흡사하다며 별점 5개를 주며 흡족해했다.
신혼여행지인 몰디브로 가는 중에 싱가폴에서 하루 관광을 했다.
호텔에서 출발해 보태닉 가든, 차이나 타운, 리틀 인디아, 그리고 쇼핑가를 도니 하루가 알차게 지났다.
햇빛이 짱짱한 가운데 보태닉 가든을 구경하며 나무 한번 잘 큰다, 난 종류도 많기도 하다 감탄을 좀 하다보니 무더운 싱가폴 날씨에 지칠대로 지쳤다.
시원한 아이스티나 마시자며 노천 카페 앞에 왔을 때 벤치 아래에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눈에 띈다. 남편이 아이스티를 사는 동안 나는 이 고양이를 좀 탐색해 보기로 한다.
사람을 피하는 고양이인가? (눈을 마주치며 불러도 도망가지 않는 것으로 봐 아님)
사람을 무시하는 고양이인가? (얼르는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다가가니 조금씩 나를 의식하며 대꾸를 할까말까 망설..)
만져도 달아나 버리지 않을 고양이인가? (한손을 내밀어 코앞에 대고 안심시키고 살짝 이마를 만져주는데 싫지 않은 눈치)
손길을 기다리던 고양이인가? (아기 부르듯 부르며 애정어린 손길로 만져주고 쓰다듬으니 점점 녹음..)
나에게 마음을 열어줄 수도 있는 고양이인가? (남편이 아이스티를 들고오니 벤치에서 떨어져 앉더니 돌아보며 자꾸 나를 부른다. 나 그 손길 또 주면 안돼???)
낯선 싱가폴의 공원에서 만난 나와 고양이.
그의 유연하고 부드럽고 깃털같은 감촉과 섬세한 움직임, 그리고 낮잠의 몽롱함이 담긴 눈동자, 경계심을 버린 후 애정을 달라는 투정어린 울음 소리..
다 꿈만 같다.




결국 길 한가운데에서 나의 애무를 받던 고양이는
내가 떠나야 할 때가 되어 인사를 하자 '정말 두고 가는 거야?'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그 눈길이 잊혀지지 않는다.
체념하고 낮은 풀숲에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신혼여행도 잘 다녀오고 친정집에서 짐도 다 챙겨오고 왠지 휑하게 느껴질 것만 같은 집에서 엄마 아빠는 둘이 뭘하며 지내고 있을까 생각하며 눈물 도는 것도 수차례,
남편이 된 남자친구의 좋은 친척분들과 더 많이 친해지고 포옹도 많이하고, 새로운 집에서 눈 뜨고, 잠이 들고, 밥을 먹고
(시어머니가 챙겨주시는.. 우리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얻은 게 맞으실까..-.-),
방에 들여놓을 쓰레기통을 사고 마음에 드는 스탠드 고르느라 같이 인터넷을 뒤지고
(서방님:'그녀에게'에 나오는 스탠드로 사야해!)
새로운 출근길을 지나 회사에 가고 오고...
(다년간 출근거리 20분 반경에서 살던 나로서는 대략 낭패)
이제 입을 일 없을 웨딩 드레스며 만날 일 없는 샵 주인들, 모두 빠이빠이~
어떤 다른 새로운 땅에 맨발로 첫발을 내딛는 기분...
내가 살던 세계의 범주가 확장되고.. 다른 레벨에 접어든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식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허둥대며 준비한 것들이 드디어 오늘 한다 이거지..
결혼 전날밤 엄마가 같이 자자고 했을 때 또 눈물나는 얘기들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엄마가 옆에 누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자 마자 눈썹칼을 가져와 엄마 눈썹 정리를 해주고 SK2 마스크 팩을 가져와서 붙여버렸다.
그래서 엄마는 반듯하게 누워서 조용히 잠들어야 했다.
지금 울면 그치지 못할 거 같아서. 그냥 편안하게 조금만 마음 아리면서 그렇게 자고 싶었다.
하긴 새벽 4시까지 회사에 제출하지 못한 평가서를 작성하느라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으니 피곤해서라도 잘 자기는 했을 텐데.
어제 하지 못한 얘기는 오늘 아침 식탁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아침 식사라고 하니 정말 내가 떠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아빠는 끝내 별 말 없이 식사하시고..
엄마는 상처받은 것이 있다면 오늘 다 잊어버리고 알콩달콩 예쁘게 살라며..
목 메여 죽는 줄 알았다.
예비 신랑은 아침에 전화해서 도망가지 말라고 당부하더라.. -.-
원래 일을 하려고, 저녁에 잠도 두시간 자고 일어나 컴터 앞에 앉았다.
원래 지금 일을 해야 하는 건데, 감성지수가 평균보다 8배가량 높아지면서
오랜만에 '쓰고' 싶어졌다.
자토이치의 기타노 다케시를 보면서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마지막 게다 난타공연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토이치.. 재밌었다.
다케시의 유머도 좋고. 눈 그려놓은 장면에선 얼마나 웃었는지. 그리고 춤추는 남자 매력적이었음.)
외할아버지는 저렇게 웃긴 사람은 아니었지만, 왠지 다케시랑 닮았다고 생각한다.
다케시가 자토이치에서 노점하던 할머니네 집 마루에 걸터앉아 '흐흐흐' 웃는 모습을 보며.
다케시는 정말 멋지게 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난도 있었지만, 자기 재능대로 '다케시 스타일'의 인생과 작품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이런 할아버지랑 친하다면 정말 재미있겠다. 맨날 맨날 할아버지 집에 놀러갈 텐데 (뭐 다케시의 사생활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멋지다. 나도 늙어가며 그런 완성을 이루고 싶다.
'할아버지, 안녕!' 이라는 제목으로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는데 아직도 못 쓰고 있다.
96년 4월 21일로부터 8년이 흘렀다.
봄향기가 대기 중에 가득했던 그때,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지.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아달라는 건지 몰라도 상관 없다는 건지
"난 왜 이렇게 화진이가 좋을까?"라고 하며 웃으며 쳐다보던 그와 말이다.
8년의 연애 끝에 이제 결혼.
내가 뭐... 언제는 안그랬느냐마는, 결혼을 앞두고도 역시 이런 저런 생각에 온갖 걱정과 고민과 불안..
친한 동생이 그런 내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는 영화는 '냉정과 열정 사이' 였다.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도 음악과 영상은 좋지만,
포스터에서 왠 동사서독의 장국영도 아니고 머리가 잔뜩 흘러내린 다케노우치 유타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 뭐, 러브스토리겠지.. 하고 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사실 책은 더욱 보기 싫었었다.. 남자 작가와 여자 작가가 쓴 러브 스토리.. 안 땡겼으니까..)
왜 보여주고 싶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꼭 우리 같잖아..
대학에서 처음 만난 준세이와 아오이의 모습이나, 혼자인걸 버텨내는 상대의 마음을 열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기.
그리고 마음과 달리 차갑게 말하는 것도 좀.
10년.. 그리고 플랫폼에서 준세이가 짓는 형언할 수 없는 미소..
그 미소가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얘기해 줄 수도 없는 얘기를 해준 것만 같았다.
언제나 저렇게 웃어줄 수 있겠어? 처음같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