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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6: 행위자네트워크이론, 온라인/오프라인, 창의적인 혁신가

책을 읽다 충격적인 그림을 만났다. 지금까지 조각나 흩어져 있던 네트워크에 대한 지식들이 서로 포옹하며 키스하는 기분이었다.

"연결을 고려하면, a는 b보다 e에 더 가깝다."

이 책 《인간‧사물‧동맹》이 다루고 있는 행위자네트워크이론(Actor-Network Theory, 이하 ANT)의 '네트워크'는 인터넷 분야나 업계에서 말하는 네트워크 개념과는 다르다. 후자는 주로 컴퓨터 통신망이나 사람들이 통신망을 통해 연결된, 연결망을 말하는데, 전자는 "실재하는 연결망이 아니라", "행위자들의 '연합'(association)의 효과" 이고, "행위자는 언제나 행위자인 동시에 네트워크"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이론을 만드는 데 주된 역할을 한 브루노 라투르는 이 '네트워크'는 컴퓨터 네트워크나 사회적 네트워크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ANT는 인터넷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위의 그림으로 돌아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 보자.

네트워크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의 첫 번째 이점은 '거리의 횡포' 또는 근접성을 제거한다는 데 있다. … 나와 옆 공중전화 부스에 있는 누군가의 거리는 1미터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6천 마일 떨어진 어머니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 내 아들은 학교에서 동갑내기인 어린 아랍 소년과 함께 앉아 있을 수 있지만, 1학년 때 이런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중에는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게 될 세계에서 표류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 네트워크 개념은 우리가 공간을 정의하는 데서 지질학자들의 횡포를 걷어내는 것을 돕고, 우리에게 사회적이거나 '실제'의 공간이라는 관념이 아닌 관계라는 관념을 제공한다.

이 개념들을 이용하여 내가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온라인/오프라인'이라는 인터넷 중심의 오래된 메타포를 걷어내는 것이다. 알다시피, 온라인은 인터넷에 연결된 상태나 공간을, 오프라인은 그렇지 않은 상태나 공간을 가리킨다. 단적인 사례를 들어 이 메타포가 여전히 의미가 있는지 물음을 던져보자.

컴퓨터 앞에 앉아 웹 브라우저, 메신저를 사용하고 있다. 온라인 상태이다. 컴퓨터를 끄고 외출을 했다. 오프라인 상태다. 그런데 항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지금은 무슨 상태일까? 이른바 '항상 온라인'(Always-on)인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좀 더 본질적인 의문을 가져본다. 내 육체는 항상 오프라인 공간에 존재하고, 온라인 공간에 진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신만이 온라인 공간에 진입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온전한 내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면 내 몸의 일부처럼 항상 주머니에 넣거나 손에 쥐고 있는, 언제든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스마트폰이 나를 항상 온라인 공간에 연결시켜 놓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바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새로운 기술로 인해 온라인/오프라인이라는 이분법 메타포의 경계가 흐려지거나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제 이 낡은 메타포를 폐기함으로써 더 많은 행위자들을 네트워크로 초대하여 더욱 풍성한 설명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ANT의 7가지 테제를 살펴보자.

  1. ANT는 경계 넘기를 꾀한다.
  2. ANT는 비인간(nonhuman)에 적극적 역할을 부여한다.
  3. ANT의 행위자는 곧 네트워크(network)이다.
  4. 네트워크 건설 과정이 번역(translation)이며, 번역을 이해하는 것이 ANT의 핵심이다.
  5. 네트워크를 잘 기술(description)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이론이다.
  6. ANT는 권력(power)의 기원과 효과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7. ANT의 '사물의 정치학'은 민주주의를 위해 열려 있다.

인터넷, 특히 웹의 초창기에는 이 온라인/오프라인 메타포가 제법 쓸모 있었다. 이 둘의 상관 관계나 사용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오프라인'에 이미 있던 서비스나 사업모델을 '온라인화'하는 것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많은 개인과 기업들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시행착오를 거치고, 몇 개의 서비스들만이 살아남았다.

이와 관련하여 ANT가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참고할만하다. "기술의 효과, 용도, 의미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거의 대부분은 예측하지 못했던(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흥미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술이 처음에 발명되었을 때 속한 네트워크와는 다른 네트워크에 편입되면서,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효과, 용도,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기술의 발전에 맥락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엔지니어나 디자이너만이 아니라 기술의 사용자도 기술의 발전과 변화를 낳는 중요한 주체라는 것"이고, "어떤 특정한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발전하고 널리 사용되는 기술이 다른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의적인 혁신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예상하는 예언자의 능력이 아니라, 기술의 궤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외의 결과에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 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속에서 과거에는 없던 인간-기술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기술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2010-08-23

스멀스멀 새벽

새벽에 나를 짓누르는 것들이 있다. 가슴 한 구석의 방에 쌓아둔 것들. 정리되지 않고, 자물쇠로 채워 놓지도 않은. 살짝 열린 문 틈으로 어두운 새벽의, 정신의 빛이 가늘게 어른거릴 때, 그것들은 어느샌가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절반쯤 고개를 내밀어 나를 쳐다본다.

피하고 싶은 문제들, 시도하고 싶지 않은 해결책들, 이루기 힘든 목표들, 오래 걸리는 즐거움들, 반복되는 포기들, 피할 수 없는 열등감, 모든 부정적인 것들. 언젠가는, 언젠가는을 되뇌이며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

사실 그것들이 나를 만들어 왔으며, 나의 힘이었다. 어두운 힘. 등 뒤에 벼랑이 있다고 상상하며 한 발자국만 밀리면 끝이다라거나 될 때로 되라며 몸을 내맡기는, 지금이 중요하다며 내일을 내 일로 여기지 않는 방식. 이 모든 것들이 쳐들어오는 시간. 세 시에서 다섯 시 무렵. 두 아이의 눈빛과 미소를 떠올리며 선을 긋는다. 이만큼, 이만큼. 세 번 안에 돌아와야 하는 땅따먹기처럼 너무 멀리 가면 위험하다.

가슴 속의 잡동사니들을 어떻게 할까? 문제는, 잘못 건드려 화라도 돋구면 대책 없이 커져버리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잘 달래어, 공책으로 옮겨,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수 밖에 없다. 세상 밖으로 풀어놓기. 아니면, 그 눅눅하고 어두운 방을 활짝 열어서 환히 텅 비우는 것이다. 그런다고 잡동사니들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지는 않겠지만, 스멀스멀 잠식해 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펜과 공책으로 가능한 것들이니, 20대의 나이에,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멋지게 날리시던 분들, 지금쯤은 구원 받으셨는지 한 소식 좀 전해주시길.

2010-08-22

  • 아무튼, 나와 남의 생각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알 수 없는 삶이지만 조각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일기를 쓰자는 것이 결론이다. http://bit.ly/aFqlOL #
  • I liked a YouTube video — Giant Stinson Beach Bubbles (Canon 550D) http://youtu.be/3i-zYdOPG2k?a #

2-55-5: 좌담회, 일기

지난 수요일(8.18)에는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출간 기념으로 열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 좌담회를 다녀왔다. 좌담자는 강유원 선생님, 김영건 선생님, 이유선 선생님이셨다. 세 분 모두 존경하는 철학자들이시다. 기억에 남는 것은, 세 분 모두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오셨음에도, 한국에서 철학 뿐만 아니라 '학문'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 힘들 것이라고 담담히 말씀하시던 것,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모두를 넘나드는 '양손잡이'가 되어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 세 분이 각자 다른 분야의 철학을 전공하셨지만 핵심과 방향에 있어서는 크게 동감을 이루고 계신 것 같았다는 것이다(하비 맨스필드에 대한 호오는 제외하고).

이유선 선생님은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는 부분은, 남이섬으로 가족 소풍을 간 일화가 등장하는 '마음의 존재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정영문 《달에 홀린 광대》' 편이다. 좌담회 중 강유원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런 답답하리만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철학과 만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흥미로운 충격이었다. 왜? 나의 지리한 일상도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에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이, "하나 하나의 글들이 세 토막짜리 형식"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철학적인 개념이나 문제에 대해서 철학자 혹은 철학책과 함께 간단히 언급하고, 그런 개념이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는 문학작품에서 몇 구절을 가져와 연결지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좌담회에서도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밝힌 참석자들이 이유선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했다.

이유선 선생님은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을 계승하여 네오프래그머티즘으로 재창조한 리처드 로티에 대한 책인 《리처드 로티》라는 책을 쓰셨다. 이 책을 참고하면 왜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라는 제목이 만들어졌고, 세 토막짜리 형식을 갖게 되었는지 눈치 챌 수 있다. 일부 인용해 보겠다.

  문학적인 문화는 보편적인 진리라는 개념에 대한 강박증에서 벗어난 문화이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창조자이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리에 대한 창조자이다. 누구나 자신의 메타포를 가지고 저마다의 삶을 뽐낼 수 있도록 배려되는 문화이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진리를 타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천에 대한 책임을 인간을 넘어선 어떤 것에 돌리지 않는다.
  문학적인 문화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로티는 문학적인 문화의 영웅을 시인과 혁명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이란 자아창조의 작업에 뛰어난 인물이며, 혁명가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실천가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사적인 영역에서 후자는 공적인 영역에서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로티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별개로 보고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론적 탐구의 작업이 타자에게 강요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아이러니스트적인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신의 글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거나 영향을 미치기 바라는 이들에게는 탐탁치 않은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블로그에 일기를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일기처럼 앞의 내용들을 포괄하며, 바로 내 옆에 있고, 읽는 이들에게 친숙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내 일기로 세상을 바꾸겠어, 라며 비장하게 각오하는 사람은 없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일기를 왜 공개적으로 쓰려고 하는 것일까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존경하는 김구용 선생의 산문집 《인연》 중 '일기는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편을 소개하고 싶다. 역시 일부 인용한다.

  요즘 세말에 나오는 일기책은 종류도 다양하고 가지가지 특색이 있더군요. 언젠가 보니 열쇠가 붙어 있어 잠그도록 만든 일기책도 있었습니다. 남이 읽을 수 없도록 지켜준다는 뜻이겠지요.
  나는 그런 일기책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이 읽어서는 안 될 일기라면 쓸 필요조차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안네의 일기》는 비밀히 쓴 일기였습니다만 마침내 그 일기는 많은 독자를 가졌습니다. 《도둑 일기》는 프랑스 작가 장 즈네가 남들이 읽어주기를 바라고서 쓴 작품입니다.
  이런 뜻에서 남이 읽어서는 안 될 일기를 쓴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요, 실례되는 짓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많습니다. 일기도 문학의 일종이라면 사실만을 그대로 기록해서는 가치가 없습니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만의 큰 사건은 아닙니다. 말이란 묘한 것이어서 같은 뜻일지라도 표현에 따라 얼마든지 품격 있게 더 절실하게 전달된다는 경우를, 우리는 평소의 독서에서 많이 느껴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남이 보아서는 안 될 일기를 쓰느니보다는 사실보다도 더 감명을 줄 수 있는 표현을 닦아야 합니다."

아무튼, 나와 남의 생각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알 수 없는 삶이지만 조각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일기를 쓰자는 것이 결론이다.

2010-08-21

  • 어이가 없구만. #

2010-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