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1, 2학년 때까지는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노력했었다.
그 후 인생 뭐 있어라는 생각이 조금씩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글씨도 우연에 의지하는 경향이 생겨버렸는데,
한 획 한 획을 세심히 긋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흘려쓰고 그 속도로 인해 획이 그어지며 예쁜 글씨가 쓰여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가끔씩 예쁜 글씨가 써지면 들여다보고 맘에 들어 다시 빨리 흘려쓰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 그 글씨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신언서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내 마음상태가 글씨에 비친 것이다. 막연히 하다보면 뭔가 되겠지라는.
이걸 요새 천천히 글씨를 쓰며 알았다. 대부분 천천히 쓰면 예쁘게 써진다.
이제 컴퓨터 때문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씨를 쓸 여유조차 갖기 어려운 분위기지만, 서예가 수양이 된다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요샌 글씨가 안 풀리면 천천히 획을 긋는다. 획이 시작되고 끝나야 할 점, 간격을 예상하면서.
그게 꼭 붓이 아니어도 상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