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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며칠 전 신문에, 읽었던 책에 대한 소개가 나왔다. 책 제목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여름언덕). 드물게, 몇 명에게 빌려줬던 책인데, 모두들 제목만 보고 내용을 지레 짐작했는지 읽고 나서는 그런 책일지 몰랐단다(감사인지 원망인지). 무리도 아닌 것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정직하게 거짓말하는 법’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렵다. 일상 중 책에 대한 대화를 위해서는 서로 간에 ‘그 책 읽었어?’를 확인한다. 읽지도 않고 떠드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심하게는 사기꾼으로 몰릴 수 있다. 책읽기에 관한 최소한 몇 가지의 금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은 그 당연하게 여겨지는 금기들을 뒤집으며 ‘책읽기’를 다시 해석한다.

이 책에 대한 강유원 선생님의 서평을 인용해 보자(서평 전문은 allestelle.net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대우주와의 연쇄가 끊어진 집단은 집단 속의 개인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은, 온갖 측면에서 길어올려진 이야기들이 개인의 귀근처로 다가와서 개인의 머리 속으로, 가슴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은 이들은 소곤거리며 그것을 주고받으며, 가끔은 단어 하나에 문장 형식에 목소리를 높이고 그것을 진지한 취향으로 정당화한다. 기원origin을 알 수 없으니 독창성originality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기댈 것은 ‘자기-진실성의 이상’ 뿐이다.

진실, 그것도 내면의 진실은 객관적 공유의 공간에 나설 수 없고, 나선 순간 공허해진다. 그 누가 믿겠는가, 그것이 진실임을, 내면 밖으로 나온 것은 내면 밖에 있기 때문에, 더이상 내면에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진실일 수 없다.

두 사람이 같은 책을 읽은뒤,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책이라는 매체가 끼어들면 대화가 조금이라도 가능해질까.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읽는 주관은 ‘근대의 주장’과는 달리 철저하게 독립적인 자기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일부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주관들과 경계를 겹치고 있는, 집단의 일부이다. 실상을 인지하고 못하고 여전히 저 주장을 고수하는 것은 착각하는 근대인의 고집이요, 저 주장을 저만치 밀고나간 것은 근대의 심층적 자기 고립과 착각의 심화에 불과하다.

우주와의 연쇄를 잃어버린 이는 외롭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자기-진실성에 침잠하기 보다는 자기정체성의 공공성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자 하나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하니 참으로 고통스럽다. 여기서 그만 두어도 그만이고, 앞으로 나아가도 된다. 그렇다면 책을 딛으며 앞으로 나아갈 이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이제 책 하나 하나를 읽어서, 그러한 읽기를 쌓아올려 모든 책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버려야 한다.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소통과 연결선들”, “관념들 사이의 관계가 관념들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론”에 의존하는 것이요, 책과 저자 전체가 공유해야 할 “집단 도서관”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책읽기는 고립된 섬에서 까닭없이 보석을 모으는 일이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책만이 아니라 비물질적 대상 일반으로까지 이러한 생각을 확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집단 도서관은 책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책에 대해 주고받는 이야기들, 책이 야기하는 모든 반응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집단 도서관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고 — 이것이 가능하다면 — 그 세계 속의 타인과 상호작용하는데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가상적이지만 동시에 실체적인 공동의 객관적 정신이라 하겠다.

내면 도서관이 없다면 새로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 하나 받아들일 수 없다. 백지상태에서 무언가를 써넣을 수 없다. 내면 도서관이 있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과 합치되지 않는 것들은 거부된다. 그러나 내면 도서관은 외부의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인다. 내면 도서관에는 “내면의 책”이 있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필터처럼 기능하면서, 어떤 요소들은 간직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자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텍스트들의 수용을 결정짓는다.” 그리하여 책은 이렇게 저렇게 찢기고 조각나서 “결국에는 내면의 책에 의해 구성된 성찰의 틀 속으로 녹아들아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우리는 대상을 온전히 가져올 수 없다. 우리가 만들어낸 텍스트들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우리가 내면에서 만들어낸 책들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일 뿐이다.”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흔히 있는 경우이며, 부끄러움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것, 즉 책이 아니라 어떤 복합적인 담론상황 — 책은 이 담론상황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결과이다 — 에 관심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자기 자신이 창조자가 되는 것, 바로 이 계획이 이 책에서 우리가 일련의 예들을 바탕으로 행한 모든 사실 확인의 귀착점이며, 이는 내적 진전을 통해 잘못을 저지른다는 느낌으로부터 해방된 이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계획이다.”

문화, 공유하는 지식

그리고, 움베르트 에코의 인터뷰(출처: ‘움베르트 에코, 인터넷 지식의 위험성‘ by 파리13구)가 떠올랐다.

우리 시대의 기억이란 보르헤스가 상상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물인 퓌네스를 떠올리게 한다.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바보같은 짓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여과없는 기억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인테넷에서, 우리는 더이상 허위 와 진실을 구분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이 기억의 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문화란 공유되고, 토론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집단을 문화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토론하고 협상해서, 보존해야만 하는 것을 위해서, 특정한 작품들, 사이비 생각들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다는 것에 합의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식의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만인이 공유하는 지식이 없었다면, 지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과학혁명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소통 불가능성, 보편적 지식의 불가능성이라는 직면해 있다. 분명히, 사람들에게 보편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학교를 통해 이루어 지고 있지만, 점점 보편적 지식들이 특수한 흠집내기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자신만을 위한 백과사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문화란 바로 바보들이 틀리지 않게 바로잡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문화를 만들고 문화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보편적 지식(공동 지식)을 위한 “집단 도서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집단 도서관”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세계 속의 타인과 상호작용하는데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가상적이지만 동시에 실체적인 공동의 객관적 정신”이고, 이것은 상호작용을 위한 ‘매개’의 관점으로 다시 볼 수 있다.

트위터에서 상호작용은?

우리는 트위터를 하며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상호작용’을 앞의 내용에 나온 맥락으로 한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우리는 트위터에서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을 공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트위터가 이 시대의,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의 단초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트위터 사용자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자기 마음대로 팔로잉을 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맥락에 가까운 타임라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팔로잉하지 않은, 심지어 팔로잉했다가 보기 싫어서 언팔로잉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리트위팅을 통해 자신의 타임라인에 나타났을 때의 그 불쾌함이란!(이 내용은 트위터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가 닿지 같겠다.)

트위터나 관련 서비스들도 이 맥락을 묶어 서비스하려고 이런저런 시도(해쉬 태그, 그룹 서비스, 트렌드 검색 등)를 하고 있으나, 이것을 통한 회원 간의 상호작용은 하나의 사건, 주제, 소재를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정신 없이 촉발되고 소멸되고를 반복한다. 하나의 주제가 지속되려면 계속 연료를 제공해야 한다. 많은 이들을 팔로잉하고 있는 사람의 타임라인에는 이런 갖가지 내용의 ‘불꽃’들이 정신없이 터질텐데, 그것들에 조금씩이라도 관심을 보이는지 아니면 무시하는지 내게는 아직 수수께끼이다.

트위터에 대해 궁금한 것은 이거다. 사람들은 과연 이 정도 수준의 상호작용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인가? 완벽한 소통을 위한 상호작용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친밀한 대상과만 시도하는가? 또는 우리 시대는 이 정도 수준의 상호작용에 만족하고, 공동의 객관적 정신의 구축을 통한 것이 아닌, 새로운 매체를 개발하고 그에 적응하며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인가? 비관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역시 존댓말로는 글을 못 쓰겠어.)

@h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