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7: 쓰기, 말하기, 듣기

Writing Notes with Grammy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을 하셨었다. ‘작가가 될지 안 될지를 선택하는 게 아니야.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거나 글을 쓰지 않는 작가가 되는 것 둘 중 하나일 뿐이란다.’ 엄마도 분명히 아셨겠지만 그때 내게 말하지 않으신 건, 작가인데도 글을 쓰고 있지 않다면,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신의 은총 덕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길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은 사무엘 베케트의 유명한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많은 시간을 준다. ‘실패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성공하려면 실패해야만 한다. 실패하기 위해서는 시도해야만 한다. 시도하기 위해서는 출발선 위에 서야만 한다. 종이에 옮겨진 나의 좁고 근시안적인 세계관을 모두가 비웃는 것을 각오하고서 말이다. 글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불완전한 삶이 글을 쓰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작가가 되는 것이다.” (‘On Writing, Not Writing, and the Writing Life‘)

글을 쓰고 싶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강박. 문학청년을 꿈꾸고, 책을 내고, 어떻게든 문단의 말석에라도 이름을 올리고 싶은, 또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 글만 쓰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구. 그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숭배하고 그들의 새 책이 나오면 따지지 않고 경쟁적으로 사 읽고, 읽기만 하다가 쓰는 방법은 잃어버리는. 이쯤되면 글이란 게 다 뭐람하는 생각과 함께 내 글쓰기 욕망 같은 건 참 생뚱맞게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볼 수록 소외된달까. 자, 내 자신으로 돌아오자.

최소 사항은 이거다: 난 글을 쓸 때 가장 흥미롭고 만족하고 행복하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글을 써라. “안 쓰면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자신부터 행복해지렴 — 뻔하지만 맞는 말. 아내와 싸우고 아이들 뒤치닥거리에 피곤하고 회사일이 잘 안 풀리고 이번달 카드 결제일이 걱정되어도 그런 것들이 날 쓰게 만든다는 걸 항상 기억하는 것. 이게 비록 날 시인이나 소설가로 만들어주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행복할 순 있다는 거. 그런데 행복 앞에 최소한을 붙이는 건 건방지잖아.

어렴풋이 작가 같은 것이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대학 겨울방학 때였나. 과제 때문이었는지 태백산 기슭에서 열리는, 물론 혼자이거나 친구들과였다면 안 갔을, 굿 경연대회 같은 것을 보러 갔다. 잠깐 보고는 서울로 가리라며 지켜보다가 홀딱 빠져들었는데, 이런 기억을 떠오르게 한 것은 이 기사에 나온 천태산의 거대한 은행나무 때문이다. 그 무당 할머니들은 정말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원초적 자연, 날것, 생명, 경외 그런 것들과 연결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은, 내 안의 서글픔을 흐느끼며 털어놓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존재였다. 그 무당 할머니들은 몇 분이나 살아 계실까. 올겨울에 보러 가고 싶다, 이 은행나무.

스파르타 주민들은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laconic(간명한, 말수가 적은)’이라는 단어 자체가 스파르타를 둘러싸고 있던 라코니아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의 분위기가 잘 읽힌다.” (“‘욥기’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는…“)

‘laconic’을 영어사전(네이버)에서 찾아보면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할 말만 하는”이라는 뜻과 함께 예문을 보여주는데 재밌다. “If you describe someone as laconic, you mean that they use very few words to say something, so that they seem casual or unfriendly.” ‘할 말만 하면 불친절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난 이게 뭔지 안다. 이를테면 이런 상황이다. 내가 밥을 먹는다. 옆에 어른이 계신다. 식사하셨냐고 물어보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핀잔을 듣는다. 근데 나는 그 분이 식사하셨다는 얘기를 아까 들었다. 왜 물으나마나 한 소리를 해야하냐고 묻는다. 빈말이라도 하는 거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자꾸 핀잔을 듣다보니 왠지 물어야할 것 같고, 어른이 된 지금은 묻는다. 물으면서도 궁금하지는 않다. 그냥 인간관계의 기름칠 같은 거라고 생각할뿐이다.

이런 거 많다. 좀 친해지면 미혼들에게 애인 있느냐 결혼 언제 하느냐고 묻는 것.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사실대로 구체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하는 일은 잘 되시구요라고 묻는 것. 평소에 연락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새해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 같은 것(그것도 새해, 설날 두 번씩이나). 모두 필요한 말, ‘할 말’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화난 것처럼 보인다지만, 말을 많이 하면 내 스스로가 싫어진다. 그래서 난 친구가 적다. 그게 좋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가족들과는 할 말이 많아야 한다. 특히 아내와는(이건 자기검열이 아니다). 이건 할 말이 많은 좋은 남편/아빠와 할 말이 없는 좋은 남편/아빠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할 말이 많은 좋은 남편/아빠와 할 말이 없는 나쁜 남편/아빠의 문제다.

사실 난 듣는 게 좋다. 스스로 청각이 예민하다고 생각한다. 청력검사를 해봐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음악도 좋아한다. 그런데 기백만 원씩 들여서 오디오 시스템을 장만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그때그때 분수에 맞는 것으로 즐겨와서인지 크게 욕심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듣는 장르도 다양해지고 좋은 기계로 한 두 번 들어보니 PC-Fi 시스템을 구축해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겼다. 하이파이(Hi-Fi)가 아니라 PC-Fi인 이유는 컴퓨터와 친숙하다는 이유도 있고, 하이파이 매니아의 ‘오명’은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그 세계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PC-Fi로 본 융합의 현주소‘에 나온 것처럼, 내 경우 역시 씨디를 사더라도 리핑한 이후에는 다시 씨디를 찾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질을 따지기는 힘들지만, 해외 인터넷 라디오에서는 국내에서 듣기 어려운 음악을 24시간 들려주고 있고, 그걸 피씨 스피커로만 듣는 것이 아쉽다. 한때 씨디를 모으기도 했지만 난 책 모으는 것 외에는 애착이 안 생기므로 씨디에까지 방 공간을 내주기가 싫다. 올해 이사 후 씨디들은 침대 밑 박스 안에 ‘그냥’ 있다. PC-Fi가 대중화되어도 기본적인 스피커 가격은 안 내려가겠지만 그 외의 기기들이라도 가벼운 가격이 되어서 내 장기 프로젝트인 ‘거실에 오디오 시스템 구축하여 이웃 눈치 안 보고 음악 크게 듣기’를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