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클럽 ‘읽은 책을 다시 읽는 모임’

강유원 선생님께서 독서클럽을 시작하신다.
읽은 책에 관한 생각을 나누고 싶지만 마땅한 모임도 없고, 모임이 있어도 그에 따르는 친교 과정이 부담스럽고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 맞을 것 같다. 뒷풀이 같은 것 절대 없다는 전언이다.
그 달의 책만 다 읽어가면 참석할 수 있고, 얘기만 들어도 되고, 그러니까 정말 책을 위한 모임인 것이다.
2008년 1월의 책은 헨리 페트로스키의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이다.
많은 직장인 동료들의 참여가 기대된다.

대화

대화는 단지 음성을 주고받는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유되어 있는 의미들을 주고받는 활동이다.

《플라톤》, 남경희, 489쪽

문어에서 구어로

문어文語보다 구어口語가 우세해지고 있는 현상들을 볼 수 있다.

“시각주의 인지법”

볼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훨씬 더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영상에 중독된 일상을 살고 있는 대중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없으면 있어도 없는 게 되고, 보여줄 수 있으면 별것 아닌 것도 큰일이 된다. 우리가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것이 시각적으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여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계급투쟁은 주목투쟁이다. 누가 더 대중의 주목을 많이 뜨겁게 쟁취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정치인과 연예인만 주목투쟁을 하는 게 아니다. 주목을 받아야 취업도 하고 연애도 할 수 있다. 놀이인들 주목에서 초연할 순 없다. UCC를 보라. 모두 ‘날 좀 보소’를 애타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
시각주의 인지법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다. 먹고살기 바쁜 대중이 시각 중심으로 세상을 보겠다는데 그걸 무슨수로 말릴 것이며 그런 대중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에 대해 가장 고민해야 할 주체는 언론이다. 추상적 이슈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보도 기법을 고민해야 한다. 우연히 그림이 좋은 사건이 터져주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그림을 생산해낼 수 있는 보도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강준만의 세상읽기 - ‘이과수’보다 세차게 공공기관 개혁을 논하라”, <한겨레21>, 2007.6.5, 제662호에서 인용)

겸손과 준거점

hof님은 ‘겸손과 부끄러움‘이란 글에서 겸손은 인터넷 관련 직무에 필수적인 ‘덕목’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나는 기획, 디자인, 개발 등에 관한 능력은 ‘기능’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권장되는 미덕과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입장이다. (회사에서도 인간적으로는 말종이지만 일을 잘해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확실히 겸손이 가져다주는 많은 장점이 있으나 그 효과에 대한 설명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에 참고할만한 것을 읽었다. 조직이 아닌 개인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조직이 준거점 이상으로 이동하게 되면, 다시 말해 목표나 비전을 초과달성하게 되면 조직의 행태가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준거점 이하에서는 조직이 원기왕성하고 활동적이지만, 준거점을 초과하게 되면 과거의 성공을 방어하는 조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표 5-1> 준거점에 따른 조직의 행태 변화

  준거점 이상에서 (준거점을 낮게 잡을 때) 준거점 이하에서 (준거점을 높게 잡을 때)
새로운 이슈에 대한 인식 위협으로 인식, 스스로 세계의 정상에 앉아있는 듯함, 손실의 가능성과 연관지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 기회로 인식, 밑바닥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듯함, 이익의 가능성과 연관지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
조직 내부의 행태 억눌리고 경직적인 행태 개방적이고 유연한 행태
외부환경에 대한 대응태도 위험을 회피하고, 보수적이며, 방어적인 태도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며, 공격적인 태도

(《시나리오 플래닝》, 마츠 린드그렌, 한스 반드홀드, 212~213쪽에서 인용)

인터넷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을

지금까지 5번 정도는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여전히 재미있는 텍스트다. 10번쯤 더 읽으면 지겨워질까. 잘 모르겠다. 이 텍스트의 제목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아우라’를 떠올리겠지만 그 개념이 텍스트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술이 예술 형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그 예술 형태가 대중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직군 ― 전략, 기획, 디자인, 개발(무순) ― 에 관계없이 가끔씩 꺼내 읽어볼만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이전에 지배적인 예술 형태들의 의미와 수용방식을 어떻게 바꿔버리는지에 집중해서 보면 지금 인터넷이 바꾸고 있는 많은 것들을 또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 의견은 10번 정도 더 읽고 써 볼 생각이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PDF, 574KB, 20쪽, armarius.net)